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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혁

대분류
1. 연혁
단위

우리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군내 곳곳에서 발견된 지석묘가 있다는 사실과 온화한 기후, 비옥한 토지, 풍부한 해산물 등 자연환경이 사람살기 좋은 곳이요, 육지와 가까운 여건등으로 보아 삼한시대 이전에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연혁

연대 연혁
삼한시대 삼한시대에 남쪽 변한(弁韓)의 12개 부족국가중 군미국(軍彌國) 또는 낙노국(樂奴國)에 속하였다고 추측되고 있다.
가야시대 삼한시대를 거쳐 가야연합시대에는 6가야중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현 진주 관할인 고령(古寧)가야에 속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시대 본군이 사적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17년에서 31대 신문왕 7년(서기 677년~687년)사이다. 신라는 남해도를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 칭하고 청주(菁州:현 진주) 관할에 두어 태수(太守)를 지방장관으로하여 2개현(난포현, 평산현)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후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에 단행된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남해군(南海郡)으로 개칭되었고 강주(康州 : 청주 개칭)에 속하였다.
한편 창선도(昌善島)는 이와 때를 같이하여 종래 고자군(古自郡) 일선현(一善縣)이던 것이 고성군(固城郡) 흥선현(興善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 고려 8대 현종(顯宗) 9년(1018년)에는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본 군을 남해현(南海縣)이라 개칭하고 현령을 두었다. 그후 고려말기부터 왜구들이 남해안 일대를 통하여 약탈살상을 자행함에 따라 남해현(南海縣)은 정상행정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31대 공민왕조(恭愍王朝 : 1352~1353년)에는 진주관내 대야천(大也川 : 선천) 부곡으로 행정관서를 옮기는 사태까지 생겼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3대 태종(太宗) 14年(甲午1414年)에 행정개혁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남해현(南海縣)은 일시 하동(河東)과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하동현(河東縣)이 독립함에 따라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쳐져서 해양현(海陽縣)이 되었고 그후 금양(金陽)이 진주(晉洲)에 병합됨에 따라 남해현(南海縣)으로 복귀되었다.
당시의 행정관할은 경상도 우도에 속했으며 종2품(從二品)의 경주부윤(慶州府尹) 정3품(正三品)의 창원대도호부사(昌原大都護府使), 정3품(正三品)의 진주목(晉洲牧) 밑에 종5품(從五品) 현령(縣令) 의 소관으로 되어 있었다.
그후 7대 세조(世祖) 원년에는 지방 방위조직을 일신하고 동 12년 (1446년)에는 관제개혁과 더불어 남해지방군은 진주진관진주목사(晉洲鎭管晉洲牧使)인 첨절제사(僉節制使) 휘하에 남해현령이 절제도위(節制都尉) 급위(級位)로 관장하고 있었으며, 한편 수군(水軍)은 제포진관(劑浦鎭管) 웅천첨사(熊川僉使) 휘하에 평산포만호(平山浦萬戶)가 관장하고 있었다. 선조(先祖) 25년(1592년)부터는 임진 정유왜란의 전란지로서 7년간은 거의 무인지경(無人之境)이 된 적도 있었다. 고종(高宗) 32년(1895년)에 남해현은 남해군(南海郡)으로 개칭되었고, 1906년에는 진주목(晉洲牧)에 속해 있던 창선도(昌善島) 가 남해군으로 편입되어 8面으로 되었다.
현대 1973년 이동면(二東面)의 갈도(葛島)가 통영군(統營郡)에 편입되었고, 1979년 남해면(南海面)은 읍(邑)으로 승격되어 1읍7면이 되었으며, 1986년 4월 1일 이동면(二東面) 상주출장소가 상주면(尙州面)으로, 삼동면(三東面) 미조출장소가 미조면(彌助面)으로 승격되어 1읍9면이 되었다.

읍면연혁

읍면 연혁
남해현(南海縣) 현 군소재지)에 따라서 남해의 군명(郡名)도 여러 번 바뀌었으며 전산(轉山), 윤산(輪山), 화전(花田) 등의 별칭도 있었다. 각 읍면의 연혁을 적기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남해읍(南海邑) 지금부터 약 600여년전 군현제(郡縣制) 실시와 함께 설치되었으나 그후 수차의 변천을 거쳐 1894年 갑오개혁 전후에 현내면(縣內面)이라 부르게 되면서 근농관(勤農官), 집망(執網)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1906년 9월 24일 처음으로 면장(面長)을 두고 명칭도 읍내면(邑內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가 1917년 10월 1일 면제공포(面制公布)와 함께 남해면(南海面)이라 개칭되어 오던 중 1979년 5월 1일 읍 승격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동면(二東面) 조선 태종때부터 이동면이라 호칭되어 왔다. 1894년 이동면은 성남면(城南面)과 이동면으로 분리되어 집망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가 1906년 재차 성남면(城南面)과 합병 이동면이라고 부르면서 1957년 폐합하였으며, 1970. 4. 1 이동면 상주출장소를 설치하였으나 1989년 4월 1일 상주면으로 승격됨에 따라 분할되었다.
상주면(尙州面) 1942년 이동면 상주출장소를 설치하였다가 1957년에 출장소가 폐지되었고 1970년 4월 1일 다시 상주출장소가 부할되어 상주리?양아리를 관할하여 오다가 지역발전이 가속화 됨에 따라 1986년 4월 1일 상주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동면(三東面) 조선 태종때 금산하려(錦山下廬)에 6개동으로 조직되었다가 1818년 다시 9개동으로 행정관할을 개칭하여 삼동면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집망제(執網制)를 폐지하고 1910년 10월 1일 면으로 명칭통일과 함께 면장을 두고 면정을 집무케 하였다.
1913년 2월 물건리에 면사무소가 위치하였으나 1918년 12월 봉화리로 이전하였다가 1932년 6월에 현 위치인 지족리에 사무실을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44년 9월 1일 송정?미조 양리를 분리 관할하는 미조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1986년 4월 1일 미조출장소가 미조면으로 승격됨에따라 분할되었다.
미조면(彌助面) 1944년 삼동면 미조리에 미조출장소가 설치되어 송정?미조리를 관할하여 오던 중 지역의 발전과 주민 편의를 위하여 1986년 4월 1일 미조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면(南面) 신라 신문왕때부터 남면이라 칭하고 집망(執網)을 두었다가 1907년부터 면장을 두었다. 1913년에 면사무소를 석교리에 설치하였으나 1924년에 현재의 위치로 면사무소를 옮겼다.
서면(西面) 조선 세종때 농면(農面)이라 불리워 집망(執網)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다가 1906년 면장제로 바뀌었다. 1912년에 면사무소가 서호리에 위치하였으나 그후 1918년 남상리로 옮긴후 1938년 다시 서상리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1989년 3월 현 위치인 서상리 522-3번지에 청사를 신축하여 면민편의와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면사무소에서 9㎞ 떨어진 북부지역의 중심지인 중현리 회룡마을에 1948년 3월 중현출장소가 설치되어 노구, 중현, 정포리를 관할구역으로 행정을 수행해오다가 1998년 8월 31일 정부의 지방조직 개편에 따라 출장소가 폐지되고 본면에 통합되었다.
고현면(古縣面) 신라 신문왕때 전야산군(轉也山郡)의 소재지였으며 군내면(郡內面)이라고 불렀다. 고려 공민왕때 진주군 대야천면(大也川面)에 옮긴 일도 있으나 조선 태종때 본군 설치와 함께 내속되었다.
전야산군(轉也山郡)의 옛날 현 소재지였으므로 면명을 고현면(古縣面)이라고 칭하며 면소지는 처음 도마리에 설치하였으나 1973년 8월 30일 현 위치인 탑동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설천면(雪川面) 신라 신문왕때부터 약 80여년간에 걸쳐 전야산군(轉也山郡)의 소재지(현비란리 정태마을)였으며 동 35대 경덕왕부터 고려 30대 충정왕까지 본군에 소속되었다. 고려 31대 공민왕때 왜구로 인하여 진주대야천부곡(晋洲大也川部曲)에 옮긴 것을 위시로 조선 태종왕때부터 20년간 하남, 하동, 남양의 각현에 옮기여 있었다. 1437년에 남해현에 내속되므로서 설천면이라 호칭하고 면내를 11개 동으로 나누었다. 1896년에 남해군으로 개칭됨에 동시 천(千)을 천(川)으로 고쳐 설천면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선면(昌善面) 고려 현종때 창선현으로 진주에 속하였고 고려 원종 10년(1269년)에는 일본이 이곳 변경을 침구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이해 5월 이곳에 간직하였던 국사를 진도로 옮겼으며 고려 충선왕때 흥선(興善)이라 고쳐 감목관(監牧官)1명을 두어오다 1906년 남해군에 이속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