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용문사

원효대사는 남해와 인연이 매우 깊은 것 같다. 용문사 역사도 원효대사로부터 시작한다. 원효대사가 금산을 찾아와 보광사을 짓고 산명도 보광산이라 했다. 뒤에, 호구산에 첨성각(瞻星閣)을 세우고 금산에 있었던 보광사를 이 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용문사는 보광사의 후신으로 등장하는 사찰인 셈이다.

조선시대 현종 원년(1660)에 남해현의 남해향교와 이 절의 입구가 면대하였다 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백월당 대사가 남쪽에 있는 용소마을 위에 터를 정하고 용문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백월당 대사는 스님들과 함게 먼저 선당양당(禪堂兩堂)을 지었다. 승당은 신운이 모화하여 다음해인 현종2년(1661)에 준공했다. 그리고 6년 뒤에 일향이 대웅전을 창건하였고 지해가 윤색하였으며 성암이 봉서루를 창건하였고 태익이 낙성했다.

이밖에 나한전은 보휘, 명부전은 설웅, 향적전은 인묵, 첨성각은 설잠, 천왕각은 유탁, 수각정은 각오가 낙성한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어 숙종34년(1708)에는 염불암을 중창했다. 관음, 백운 두 암자는 고을사람들의 발원으로 축조했다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뒤에 백련암(白蓮唵)을 절의 서쪽에 신축하였다.

용문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승려들이 용감하게 싸운 호국사찰이다. 그 증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용문사에 보관 중인 삼혈포라는 대포, 그리고 숙종이 호국사찰임을 표시하기 위해 내린 수국사 금패가 그것이다.

조선 숙종(1675∼1720)은 용문사를 수국사로 지정하고 왕실에서 용문사 경내에 축원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비롯하여 연옥등, 촉대, 번 등을 하사했다. 그러나 연옥등, 촉대 등은 일본 강범기에 없어지고 지금은 번과 수국사 금패만 보존되어 있다.

소셜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시려면 소셜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 답변이 필요한 내용은 "해당 게시판"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소셜댓글이란?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아이디로 로그인 할 수 있습니다.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닫기
댓글 작성 폼

소셜 댓글 목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평가

담당부서
이동면행정복지센터 총무팀(☎ 055-860-8051)
최종수정일
2019-01-30 11:3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