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포

관음포

관음포는 고려시대 이전의 명칭이다. 남해인들은 이 곳을 감히 호국성지(護國聖地)라고 부른다. 역사적인 사실이 있다.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이 남해 고현지역에서 판각되었다. 불력으로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전체 민중의 힘을 모았던 대 역사가 남해에서 이뤄진 것이다.

팔만대장경 중 종경록 권27에 “정미세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이라는 간기가 있다. 또한 정안(鄭晏. ?~1251)은 사재를 털어 남해에 정림사(定林社)를 짓고 팔만대장경판 간행에 참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판 판각에 필요한 수많은 목재를 운송하는데는 해상경로를 이용하기에 관음포가 가장 적합한 곳이었던 것이다.

또한 고려말 우왕9년(1383)에 해도원수 정지(鄭地. 1347~1391)장군의 남해 관음포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왜선 120척이 남해로 쳐들어오자 정지장군이 이곳 관음포에서 화포를 쏘아 적선 17척을 불살랐다. 혼이 난 왜구들은 한동안 감히 쳐들어올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한 화포는 최무선(崔茂宣. 1326~1395)이 발명한 것으로 관음포에서 두 번째, 이동하는 해상전투로는 첫 번째로 사용했다. 그리고, 1592년부터 1598년 사이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관음포에서 임진왜란을 끝내는 노량해전을 1598년 11월19일에 치르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는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지극히 무인 다운 유언을 이곳에 남겼다.

노량해전 재현

해마다 4월이면 조용한 남해 노량 앞바다가 갑자기 요란한 함성과 총통 발사 소리로 뒤덮인다.조선군과 명군 연합함대와 왜군 함대가 400년의 세월을 넘어 이곳에서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왜선을 향해 육지에서는 총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사됐다.왜군을 향해 화살이 쏟아지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선군은 육박전을 펼쳤다. 관음포 육상 진지에서는 전투명령을 내리는 신호연이 수백개 떠 있다.

남해군과 지역주민들은 비록 당시 전투 규모를 그대로 재현하지는 못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조상들의 기개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해마다 4월에 열리는 벚꽃축제에서 노량해전을 재현하고 있다.

노량해전 재현은 지역주민들의 숙원이었지만, 예산 문제로 시도하지 못하다가 1998년 11월16일 이 충무공 순국 4백주년을 맞아 처음 재현을 해낸 것이다.

이날 해전에는 2,000여명의 인원과 조선 수군 19척, 명군 11척,왜군 19척등 모두 49척의 전함(어선)이 참가했다.형형색색의 깃발을 꽂은 전함 위에서는 고증을 통해 만든 당시 군복을 입고 활 칼 창 조총 등으로 무장한 160여명의 수군들이 실전을 방불케하는 혈전을 벌였다.해군은 이날 고속전투함 2척과 총통 조총 등의 장비를 지원,전투를 실감나게 했다. 해전은 전투를 독려하던 충무공이 장렬히 전사하고,참패한 왜군이 퇴각하면서 1시간30여분만에 끝났다.

남해군 노량해전승첩제전위원회는 2001년부터 매년 4월 26일부터 27일까지 노량해전을 재현하고 연례 행사로 계속 추진할 예정이다.

박진욱의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 중에서

이 바다가 예사로운 바다인가! 팔만대장경 판의 목재가 여물어졌던 바다, 국난을 구한 두 차례의 해전이 치루어졌던 바다, 그런 바다가 메꾸어져 뭍으로 변하였으니, '옛것을 통해 새것을 안다'고 하는 말은 이제 헛말이 되었도다.

저기 이내기 끝에 이락사가 있고 탑동에 정지석탑이 있다고 하고, 누가 이곳에서 그렇게 처참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을 기억할까? 밀물이 들어오는 철벅철벅 물이 방파제에 부딪친다. 그 소리가 정녕 장군의 노호소리 같기도 하고, 이 자리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이 바다에서 두 차례 대해전이 벌어졌다. 모두 우리 수군이 대승을 거둔 해전이고, 왜구가 낭패를 본 싸움이다. 우리 수군이 대승을 거둔 데에는 이 바다가 한 몫을 했다. 관음포가 한몫을 할 수 있는 데는 다른 바다가 가질 수 없는 모양과 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하동이 보이고 육지 사이로 쩍 갈라진 곳이 하동 포구다. 저기서 섬진강 물이 흘러나와 밀물을 타면 관음포로 밀려든다. 대장경판의 목재가 그렇게 섬진강물을 따라 관음포로 들어왔을 것이고, 왜적들이 그렇게 흘러들어 왔을 것이다.

어서리끝과 이내끝에서부터 관음포가 시작된다. 어서리끝과 이내기끝은 마치 할머니 쌈지 주머니의 끈과 같다. 끈을 조으면 주머니가 닫히고 끈을 풀면 주머니가 열린다. 어서리끝에서 이내기끝을 막어서면 관음포는 미꾸라지 잡는 통발이고, 이 안으로 적을 몰아넣으면 사냥개로 토끼몰이하기다.

아주 큰 섬인데 대도를 버팀으로 하여 넓은섬, 쪼각섬, 둥글섬, 주지섬, 긴섬이 노량목 앞에서 한 치의 비뚤어짐이 없이 일렬횡대로 막어서고 그 아래로 난초섬, 행기섬이 늘어섰다. 그리고 노량 바로 코앞에 능구렁이의 약을 돋구는 두꺼비처럼 내밀고 있는 섬이 개구리섬이다. 이 섬들은 모두 몰이꾼들이 관음포가 통발이라면 이 섬들은 약삭빠른 미꾸라지들을 통발로 몰아넣는 몰이꾼들이다.

아무리 좋은 통발과 몰이꾼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물때가 맞지 않으면 허탕이다. 물의 움직임이 없는 조금에 걸리거나 물이 빠지는 썰물에 걸리면 사냥은 허사다. 그러면 저 물살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하는 수가 없다. 그것은 하늘이 정한다.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정하는 것은 하늘인 것이다.

관음포라고 하는 고기잡는 통발, 이 통발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고려말 해도원수 정지 장군이었다. 정지가 병선 마흔일곱 척을 거느리고 나주, 목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왜구의 큰배 일백 이십 척이 경상도에 나타났다. 바닷가 마을이 겁에 떨었고 합포(마산)원수 류만수가 도움을 청했다. 정지는 밤낮으로 달려가면서 스스로 노를 저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더욱 힘을 내어 배를 저었다. 섬진강 나루에 이르러 합포의 병사들을 끌어 모을 때, 왜구는 이미 남해 관음포에 이르렀다.

『고려사』'정지전'에 나오는 글이다. 때마침 비가 왔다. 비가 오면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을 쓸 수 없다. 정지는 사람을 보내어 지리산 신사에 빌었다. "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는데, 바라건대 나를 도와 신의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그러자 오던 비가 멎었다.

관음포 앞바다에 왜구의 깃발이 하늘을 덮고 창검이 바다에 번뜩였다. 저 왜구를 관음으로 밀어 넣어야만 승산이 있다. 정지는 머리를 조아려 또 하늘에 빌었다. 문득 거센 바람이 일더니 관음포를 향하여 불어 닥쳤다. 왜선은 바람과 물결을 타고 관음포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갔다. 정지장군이 이끄는 사십여 척의 배가 어서리끝과 이내기끝을 막아섰다. 그 전공이 역시 『고려사』'정지전'에 실려 있다.

정지는 천공하여 선봉에 선 왜선 스무 척을 깨뜨리니 적의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계속 남은 적을 쏘니 화살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또 화포를 발사하여 적선 열일곱 척을 불 살랐다. 정지는 장병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전쟁마당에서 적을 여러 차례 쳐부수었으나 오늘처럼 통쾌한 적은 없었다." 두 번째로 이 관음포 통발을 이용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누구보다도 이 통발의 성능을 잘 알고 있었다.

선조 32년에 임진왜란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전남 왜교에 있던 가등청정은 권율과 의병에 의해 독 안에 든 쥐처럼 육로를 완전히 차단 당한 채, 오로지 물길로 도망갈 궁리를 내었다. 그러나 물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물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끈질긴 뇌물 공세 끝에 가등청정은 진린을 구워삶아 통과선 한 척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내었다. 통과선은 남해, 사천, 부산에 있던 왜선 5백여 척을 불러들인다.

음력 11월 17일, 왜선이 노량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무렵 조명 수군은 관음포를 마주보는 광양만에서 여전히 왜교성의 가등청정을 포위하고 있었다. 조명연합군은 왜교성의 포위를 풀고 전투태세를 취하면서 노량해협으로 나아갔다. 19일 새벽 왜선들은 밀물을 따라 노량목으로 꾸역꾸역 넘어왔다. 조명연합군은 대도에서부터 벌려 있는 작은 섬들을 따라 바다를 틀어막았다. 곧 관음포를 향한 몰이를 시작한 것이다.

물때는 열 물, 물살이 가장 센 여덟 물에서 두 물이 지난 때였다. 물때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었으니, 왜적은 이미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왜선은 물살을 따라 빠른 속도로 관음포로 밀려 들어갔다.

일본 사람 편야차웅은 『이순신과 히데요시』라는 글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일본해군이 노량해협으로 밀려 들어왔다. 연합해군은 그런 일본 해군의 머리를 짓누르듯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해도의 해안으로 밀어붙였다. 일본해군은 연합해군의 군세에 밀려 어쩔수 없이 남하했다. 그곳에 관음포라 불리는 후미진 곳이 있었다. 일본 해군은 그 후미진 곳으로 도망을 쳤다. 관음포의 후미는 좁다. 더구나 막다른 곳이다. 연합해군도 이어서 관음포 후미로 들어왔다. 관음포를 후미진 곳이라 하였으니, 편차야웅은 지형을 정확히 읽은 사람이다. 그러나 노량 바다의 물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몰랐을 것이다. 노량의 물살이 얼마나 거세며, 그 물살이 노량해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것은 그 날 싸움을 벌였던 왜인들도 몰랐던 일이다.

음력 11월 19일, 얼음같이 차가운 물결 위, 희미한 그믐달빛이 내리비치는 새벽, 2백여 척의 조명연합군의 함대와 5백여 척의 왜군 함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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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면행정복지센터 총무팀(☎ 055-860-8351)
최종수정일
2019-07-02 09: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