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2마을

작성일
2009-07-30
이름
관리자
조회 :
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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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2 마을 전경

유림2 마을 전경

향교·포교당·성당 자리잡은 청정도량 마을


세종 때인 1444년을 전후해 남해현에 부임한 현령은 읍 소재지를 순찰하다 동·서·남쪽은 방어가 튼튼하나 북쪽이 허술 한 것을 보고 나무를 심으라 하였다. 이때 유림동 고개를 중심으로 대량의 물버들나무를 심었는데 숲이 울창해지고 풍광이 빼어나 남해의 명물이었다. 지금의 유림(柳林)1·2동의 유래다. 심천리에서 성내로 들어오는 길목에 늘어서 장관을 자랑하던 버들이 베어지고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가 숨막히게 하는 유림동 고개, 도로를 가운데로 오른쪽 강두산 자락 아랫쪽이 1979년 유림1동과 분동한 유림2동이다. 가구수는 170여호지만 세대수는 280여호로 15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유림2동은

토백이는 30%정도 밖에 안된다. 주민들 생계는 대개가 상업이며 15호 정도만 농사를 짓고 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사흘 걸러 이웃이 바뀌는 통에 이장·반장 일 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고 한다.
유림2동은 향교에서 학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던 곳이라 하여 생원골이라 불려왔는데 '생원골 조기회'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림2동 주민들은 마을에 자리한 향교와 포교당, 그리고 남해성당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가운데서도 주민들이 남다른 자부심을 느끼는 곳, 바로 남해향교 이다.
남해향교는 대성전(大成殿), 동서고(東西庫), 내삼문(內三門), 명륜당(明倫堂), 동서재(東西齋), 외삼문(外三門), 홍살문(紅殺門), 고자가(庫子家) 등의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던 곳으로 본래는 현 포교당 자리에 있었다. 임진왜란때 문헌이 유실되어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현종 10년(1669년) 10월 대성전을 중수하고 그후 고종 29년(1892년) 4월 동서고, 내삼문을 현 위치로 옮겼다. 명륜당을 비롯한 건물은 1917년 옮겨왔으며 홍살문은 1982년 8월에 세워졌다. 향교는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왕조가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세운 공립 학교이다 또 유림2동에는 청아한 불경 소리와 해맑은 성당의 찬송가가 시나브로 들리는 청정도량 같은 마을이다. 불경 소리에 하루를 시작하고 닫으며 찬송가에 실려 한주가 오고 간다. 그래서인지 큰 사고, 도둑없는 곳이 유림2동이라고 한다.

●마을회관(055-864-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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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9-07-02 09:09:39